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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낌의 공동체 (연세 109호)
    Essay/Column 2019. 7. 7. 01:34

     

     

      연세대학교에 처음 소속감을 느꼈을 때는 언제였을까수시발표 날빽빽한 수험번호들 사이에서 내 이름을 발견했을 때당시 정모와 비정모를 주선하던 싸이월드 클럽에 가입했을 때? (다음 해부터는 페이스북 그룹으로 대체되었다.) OT에서 응원가를 처음 배우며낯선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사랑한다 연세를 외쳤을 때한참 과잠을 입고 다니던 3, 4, 멀리서 보이는 Y자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괜한 친근감을 느꼈을 때아카라카 날노천극장 꼭대기에서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을 보며 그 열기에 감탄했을 때지금은 연세 이 한참 전에 빠져나가 학교에 대한 원망밖에 남지 않은 3학년이지만, 1학년 1학기까지는 연세가 붙는 모든 단어와 거기에 조금이라도 속해있는 모든 사람에게 즉각적인 친밀함을 느끼곤 했다. ‘연세 동문의 집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동네 병원, ‘연고전에 관한 인터넷의 과장된 일화작가 소개에 조그맣게 써진 연세대학교 졸업’, 신촌을 활보하는 모든 사람들적어도 그 당시에 내게 연세대학교는 공동체였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물론 내가 여기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지만이곳을 여전히 나의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나 싶다. 2년 동안 학교의 갑작스러운 정책변화와 대규모 공사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온 것도 있고같은 학번 중 상당수가 휴학한 지금 아는 얼굴이 몇 없다는 점도 있지만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소속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지금의 나는 동문이라는 이유만으로 만난 적 없는 누군가와 더 가깝다거나친밀하다고 느끼지 않는다같은 시기에 연세대학교라는 공간에 속해 있다 해서 누군가와 내가 동기라는 이름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결국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도그 안에 있는 개인과 개인을 매개하는 것도 감정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개최될 무렵의 열기를 생각해보면 이는 더욱 명백하다월드컵이 열릴 때마다 등장하는 붉은 악마는 그 절정을 이루었던 2002년을 기억하는 세대가 아니더라도 모든 국민에게 익숙한 이미지일 것이다붉은 티를 입고 거리응원을 나선 사람들은 낯선 이들과 서슴없이 어깨동무하고 같은 구호를 외쳤다모르는 이와 인사말을 주고받거나 가벼운 잡담을 나누는 것을 불편해하는 문화 속에서도적어도 응원할 때만큼은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이 팽배했다집에서 혼자 텔레비전을 보던 이들도 예외는 아닌데골을 넣었을 때 동시에 터지는 이웃의 환호성에 친밀감을 느꼈다는 증언은 흔하다이렇듯 감정에 대한 호소는 이성적인 설득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즉각적이다실제로 스포츠는 사회를 통합시키기 위해 국가에서 종종 악용되는 3S 정책(Sports, Sex, Screen)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공동체라는 말조차 촌스럽게 느껴지는 지금우리가 느껴야’ 할 것, ’느끼지 못하는 것‘, 때로는 지나치게 느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공동체의 근간이 되기도이미 자리 잡은 공동체를 흔들기도 하는 감정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공존()과 공생()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수많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어렸을 때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규범을 지키고 가치를 학습하며학교 다니면서부터는 ’, ‘학원’, ’동아리 여러 공간 속 또래집단 사이에서 문화를 내면화한다굳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러 공동체를 거쳐 가며살아간다는 것은 그와 동시에 수많은 인구와 공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공존()과 함께 살아간다는 공생()은 분명 다르다공생즉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각각의 개인이 독립되어 존재하는 공존과 달리따로 떨어져 있던 개인들이 연결되어 서로에게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의미한다이는 관계에 대한 정의에도 맞닿아 있는데사전에 따르면 관계하다는 곧 참견을 하거나 끼어들다1라는 뜻이다. 국가더 나아가 지구촌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으로 본다 해도결국 공동체의 기반이 되는 것은 와 의 사적인 관계이다그리고 관계의 기본이 되는 것이 서로를 향한 존중과 공감이라는 것은 교과서적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당연한 이야기다하지만 아무리 닮았다 해도 개개인은 기본적으로 다르기에제대로 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를 향한 막연한 존중으로는 부족하다아무리 오랜 시간 보아온 사람(예컨대 가족처럼)이라 해도 결코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을 것이며그것은 이해나 이라는 논리적인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이러한 공유될 수 없는 부분을 느낌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사람이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일시적이고 희미한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나는 그저 '라는 느낌너는 그냥 ''라는 느낌그렇다면 사랑이 무엇인가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사랑은 능력이다.2

       


     

      신형철의 두 번째 평론집인 느낌의 공동체의 한 대목이자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발단이다느낌의 공동체는 두 개인이 소통하고자 할 때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단절에서 시작한다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무리 많은 것을 알더라도 각자가 다른 몸을 가진 타인인 이상우리는 서로에 완전히 이입해볼 수도 같은 감정을 느낄 수도 없다완전한 소통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가능성 내지는 시도에서 그친다신형철은 느낌이란 단어로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표현하는데그에 의하면 사랑은 그 자체로는 나눌 수 없는 느낌을 나누고자 하는 능력이자 기적이다그리고 진정한 느낌의 공동체는 이러한 느낌을 매개하는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공감(共感)이 가능케 한 공생(共生)이다.

     

      물론 범위를 넓게 잡을수록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으므로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비슷한 경험과 문화를 가진 사람끼리는쉽게 공감대를 형성하곤 하지만그것이 서로의 느낌까지 가 닿는 일은 드물다그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저 사람도 그랬겠구나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정말 어려운 것은 나와는 전혀 다른생소한 배경을 가진 타인을 만날 때이다내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일에 이입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한 능력이며굳이 사랑에 비유하지 않더라도 이는 의식적인 노력과 대상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소음(noise)과 담론(sound)

     

     

      SNS의 발달그리고 1인 문화 등의 등장과 함께 개인의 존재감은 그 어느 때보다 도드라지게 되었다때에 따라 집단보다 개인의 목소리가 더 큰 시대다그에 맞춰 지금까지는 집단 정서에 깔려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했던 목소리미디어를 장악한 주류의 목소리 사이에서 당사자를 제외한 모두에게 잊혀있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이전까지는 들을 수 없었다는 말은 그것이 사회 주류에 자리 잡지 못했다는 말이다역사적으로 강자가 모든 언론과 문화생활을 장악해왔던 것을 생각하면그 비주류의 목소리는 약자의 목소리일 수밖에 없다. ‘담론으로 자리 잡지 못한무의미한 소음으로 치부됐던 목소리다.

     

      올해 5월 17일 강남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은 명백하게 여성을 타으로 한 여성혐오 살인이었으며그것이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동네인 강남의 프랜차이즈 노래방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충격이 되었다화장실에 피해 여성이 들어오기 전까지 6명의 남성을 지나보내며 기다렸던 범인은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고평소 여자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외의 뚜렷한 살해 동기도 없었다그 시간그 장소에 피해자가 범인을 만났던 건 순전히 우연한 일이었고이러한 확률 때문에 피해자는 살해당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이후 수많은 연대의 도화선이 되었다내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공포그리고 지금까지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왔던 위협과 부당함을 고발하고 이에 공감하는 목소리가 줄을 이었다사고가 일어난 곳 부근인 강남역 9번 출구는 애도의 메시지를 적은 포스트잇으로 가득 채워졌다. SNS에서는 #나는_우연히_살아남았다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여성들의 경험담과 남성들의 문제의식을 담은 글이 쉴 새 없이 올라왔다.

     

     이때 생생하게 터져 나온 목소리들은 학계에서나 볼 법한일상과 유리된 전문적인 언어도 아니었으며몇몇을 제외하고는 넷 상에서만 통용될 법한 극단적인 언어도 아니었다개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일상적인 동시에 구체적인 생활의 언어였다.

      각각의 일화를 얘기하자면 많다수업 시간에 반장 자리도발언권도 더 많이 주어지는 건 자연스럽게 남자였다실제로 여성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은 학과에서조차 대표로 선출되는 것은 대부분 남성이다. 3사용자의 후기와 평가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카카오 택시늦은 밤 택시를 이용했을 때 기사한테 욕설과 위협을 받은 적 있는 젊은 여성들의 경험담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지금도 공중화장실에서 몰래카메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화장지 걸이를 제거한 자리에 있는 조그마한 구멍에조차 휴지를 틀어막는다.

     

     

    ( 웹툰 단지 )

     

     

      밤거리를 걷다가 지나가는 남자들한테 희롱 내지는 스토킹을 당했다는 일화남자친구한테 습관적으로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는 일화는 너무 흔해 이제는 작품 소재로 등장해도 무감각하게 바라보게 된다이별을 고했다가 남자친구에게 염산 테러를 당한 사건 이후 넷 상에는 안전 이별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레진 웹툰 단지는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서 차별과 가정폭력을 감내해야했던 주인공의 경험담이 주 내용이다작년 7월부터 레진코믹스에서 연재되었던 이 만화는 많은 여성의 공감과 지지를 바탕으로 최단 기간 최고 조회수(44일 만에 300)를 올리는 등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여는 여성들그리고 이전부터 적극적으로 외쳐왔던 여성들까지 합해 수많은 목소리가 있었다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경험을 외치고 있었기에 모두 절실하고구체적인 이야기들이었다같은 입장이었기에 연대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고다른 입장임에도 연대하려 하는 소수의 목소리가 있었다그러나 대다수의 남성은 화살처럼 빗발치는 개인적인 발화들에도 시큰둥했다그들과는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하지만 같은 사회의 구성원인 이상그리고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들과 실제적인 관계를 맺는 이상이것은 저들만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남성들이 여성들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는그것이 지금까지는 소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이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는 데에는 노력이 따른다.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4에 의하면 정치(politic)’의 근본적인 목적은 소음(noise)’으로만 자각되었던 것들을 담론(sound)’으로 형성하는 과정이다따라서 정치적인 것이란 들리지 않았던 것들을 들리게 하고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랑시에르에게 모든 정치는 역동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으며그 자체로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이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앞서 말했듯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감정이다그것이 공동체의 기반이 되었듯공동체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 역시 감정일 것이다생소하기만 했던 이야기가 하나의 가시적인 담론으로 형성되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은 이것이 다수의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통계자료도수치도개개인이 전개하는 논리도 아니다그러한 것들은 태도가 형성된 후에서야 하나의 구실로서 존재할 뿐이다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말을 귀담아들으려는 태도이며이러한 태도를 만드는 것은 타인을 향한 연민의 감정이다내가 당연히 가지고 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자각하고나는 겪은 적 없던 고통을 겪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이입하고그들이 나와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하려고 얼마간은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의지이자 용기이다이것은 모두 감정의 영역 안에 있다.

     

      흔히 감정은 이성과 달리 동물적인 것노력해서 조절해야 하는 것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라 믿어진다하지만 개인을 이루는 모든 것이 그렇듯감정 역시도 각자의 경험에 맞춰 후천적으로 다듬어진다병신이나 장애인 같아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던 사람이 옆에 있던 휠체어 사용자가 상처받는 것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하나의 사례이다당연하게 매번 깨끗한 화장실을 사용하다가도 집 안의 가사노동자가 땀을 흘리며 몇 시간씩 청소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미안함과 책임감을 느끼는 것 또한 같다이렇게 나와 다른 이가 가진 불편과 희생에 연민을 느끼고이를 배려하거나 나누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공동체의 진정한 미덕이자, ‘공생으로 갈 수 있는 길이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점은 연민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훈련과 노력을 통해 가꿔야 할 대상이라는 점이다이전까지는 존재조차 몰랐던 누군가의 고통에 가닿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힘든 일이며그것이 내가 가진 특권을 포기해야 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사랑은 능력이라는 신형철의 말이 유의미한 이유다.

     

      이렇게 이전까지 보이지 않았던훈련이 필요한 연민이 있는 동시에 이미 교육받은” 연민 또한 있다. 대중교통에서 노인을 만날 경우 자리를 비켜주거나짐을 대신 들어주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처럼 느껴진다주변에 나이 많은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노약자석에 앉는 것은 예의 없거나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손가락질받는다반면 임산부의 경우 지정석이 마련되었음에도 양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며임산부가 노약자석에 앉을 경우 욕까지 얻어먹는 일이 비일비재하다아직 사회적으로 회로화되어있지 않은 6연민이다이러한 감정은 직관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만들어지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그 과정에서 지난한 반발과 역차별이라는 구성원 다수의 분노를 거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생성될 수 있으며그렇기에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소수의 소음이 뭉치고 뭉쳐 담론을 형성하고이들이 일으킨 분노와 슬픔이 깊어져 성찰이 되었을 때그러한 성찰이 사회 전체의 연민을 가능케 할 것이라고타인의 고통을 제 몸처럼 느끼며우리는 공존을 넘어 공생할 수 있다고 말이다.

     

     

    Kibun의 사회

     

    (미국 드라마 'Orange is the New Black' 中)7  



     

      ‘맞는 말이지만 기분이 나쁘다.’ 처음 쓰였을 때 많은 이의 공감을 받아 어느새 유행어처럼 자리 잡고 말았지만이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논리다기분이 그것의 옳음’, 즉 모든 논리와 가치관에 선행하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미국 드라마에 발음 그대로 ‘Kibun'이라고 표현되어 등장하기도 했으며실제로 기분은 한국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단어다영어의 Feeling과는 달리당사자의 자존심(dignity)과 현재의 감정 상태를 모두 함축하고 있는, ‘섬세하고상처받기 쉬우며사소한 비판이나 딱딱한 말투에도 상해버리는 것이다문제 될 것 없는 내용을 말하고 있어도 어조가 신경질적이거나 표정이 굳어 있으면 한국인의 기분은 상한다정말 문제 되는 것은 자신의 일시적인 기분 때문에 다른 사람의 구체적인 고통을 외면하거나 멋대로 축소하는 일이 잦다는 것이다.

     

      실제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남성들의 지배적인 반응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기분이 상한다는 것이었다강력범죄의 피해자가 대부분 여성이어도여성이 밤길을 걷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 21세기 시대의 평범한 인식이어도아무튼지 간에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지칭하는 말이 기분이 나쁘다고 한다하지만 잠재적 범죄자는 그 자체로 별다른 혐의가 없는 말이다공항에서 짐을 검사받는 것은 탑승객 모두가 잠재적 범죄자이기 때문이며현대사회에 제도와 법이 존재하는 이유 또한 모든 시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다이처럼 기분이 나쁘다는 아무런 논리 없는 말로이것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자신을 공격하지 말라는 경고에 가깝다.

     

      연민이라는 감정의 부재와 함께특정 감정의 과잉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데그것은 극단적일 정도의 자기방어와 자기합리화이다이전까지 배척했던 타인에게 처음으로 공감하거나고통받는 이를 연민하는 것이 이상적인 공동체에 가깝다면현재 상황은 여기에서 아득하게 멀어져 있다연대하는 것을 떠나 고통받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조차 않는 수준이다. ‘공생은커녕 공존조차 불가능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현재 시점에서 황인찬 시인의 “'경이'는 내가 모르던 것을 볼 때 생겨나는데 점점 모두 '내가 무언가 모른다는 자각'을 하지 않는다그저 잠깐 놀라고 치워버린다.”8는 말은 놀라울 정도로 타당하다비주류의 목소리가 아무리 터져 나와도많은 이들은 여전히 그것을 인식하기조차 거부한다생경한 것을 바라볼 때 사람들은 우선 불쾌함을 느낀다그것을 나와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안전을 해치는위협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이곳에 지금까지의 공동체에 대한 성찰은 없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공동체는 과연 이상적인 것인가자신의 기분 외에도공동체의 이 사라졌다며 이를 해친 자들의 이기적인’ 면모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타인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지적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그리고 이를 무시하는 사람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는 주장이다응답하라 1988의 가부장성을 비판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그9 시대를 겪었던 대다수는 드라마를 보며 감동했었다그러나 그처럼 훈훈한 공동체는 그 당시 여성에게 강요되었던 희생과 억압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가능했다이처럼 강제로 유지된 공동체의 밑바탕에는 이전까지 한 번도 자각해본 적 없는 누군가의 희생이 깔려 있다.

     

      공공장소에서 미담으로 회자되는 공익 광고 중 하나는 돈이 모자라도 공짜로 태워주었다는 버스 기사의 따뜻한 마음씨와 정을 얘기한다그러나 이는 고된 노동과 적은 보수에 시달리는 기사의 사정을 무시한 채, ‘따뜻한 마음으로 이를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진정한 이란 타인의 희생을 무시한 채 당연시하는 것도나와 비슷한 입장을 가진 이한테만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그러한 것은 자기방어와 자기합리화로결국 자기반영에 불과하지 타인을 향한 공감이라 부를 수 없다기존의 공동체가 무너진다는 기득권층의 공포는 적나라하게 말해 본인의 이익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같다그와 반대로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편한 것이다낯선 감정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다시 말해서 타인의 느낌에 가닿는 일또는 내 것이 아닌 고통에 연민하며 이를 성찰하는 과정공생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존속 그 자체가 아니다약자의 희생과 억압을 전제로 했던 강자의 공동체가약자와 강자의 구분 없이 느낌으로 공생하는 모두의 공동체로 대체되는 것이다타인의 고통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사랑이라는 능력을 기반으로 한 느낌의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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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몰락의 에티카신형철문학동네, 2008, 347

    감성의 분할자크 랑시에르오윤성 역, 2000, b(도서출판 비)

    정치적 애도가 본질이다”, 나들, 2014년 5월 12

    드라마 Orange is the New Black, 3x02, 2016

    연세 107호 <당신의 가족은 안녕하십니까>

     

     

     

     

     

     

    1. ...더보기
      다음 국어사전 참고
    2. ...더보기
      「몰락의 에티카」, 신형철, 문학동네, 2008, 347쪽
    3. ...더보기
      여성과 남성의 비율이 7:3 정도로 유지되는 국제대는 현재까지도 여성회장이 뽑힌 적이 없다.
    4. ...더보기
      잘 알려진 지젝 등과 함께 21세기의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철학자이며, ‘철학자’라는 말이 주는 어감과 달리 놀랍게도 아직까지 살아 있다. 2008년에 내한하여 홍익대학교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5. ...더보기
      “정치적 활동은 어떤 신체를 그것에 배정된 장소로부터 이동시키거나 그 장소의 용도를 변경시키는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은 보일만한 장소를 갖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들고, 오직 소음만 일어났던 곳에서 담론이 들리게 하고, 소음으로만 들렸던 것을 담론으로 알아듣게 만드는 것이다”, 「감성의 분할」, 자크 랑시에르, 오윤성 역, 2000, b(도서출판 비)
    6. ...더보기
      “우리 감정은 이미 회로화돼 있습니다. 어떤 사태를 만나 감정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을 이미 교육받았거나 이미 합의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 인간이 가진 감정은 역사적 과정을 거쳐 생긴 능력입니다. 화내는 것도 능력이고 경멸하는 것도 능력입니다. 이런 부정적 감정뿐 아니라 기쁨, 즐거움, 사랑 같은 긍정적 감정도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조차 이데올로기화돼 있고 회로화돼 있는 것 아닙니까. 제대로 분노하는 것, 제대로 경멸하는 것, 그런 능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분노와 성찰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분노 없는 성찰이 무슨 성찰의 힘을 지닐 것이며, 성찰 없는 분노는 그냥 화풀이일 뿐입니다. 슬픔이 깊어지면 성찰로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성찰이 깊어지면 연민, 공동체의식으로 건너갈 수 있을 테고요.” “정치적 애도가 본질이다”, 나들, 2014년 5월 12일
    7. ...더보기
      “You know... many cultures value a person's dignity over the truth. In Korea, they actually call it kibun.” (...) “In Russia, we call it "bullshit.", Orange is the New Black, 3x02, 2016
    8. ...더보기
      황인찬 시인이 14년 12월 독립출판사 ‘유어마인드’에서 열린 그의 공동저서 「22세기 사어 수집가」 대담에서 한 말이다.
    9. ...더보기
      연세 107호 <당신의 가족은 안녕하십니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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